박혜리의 별별 도시 이야기 (9) 인사동 '조선살롱'
K는 집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종로로 향하여 내려가다가 승동예배당 다음 골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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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아 H의 인력거가 종로에서 사동 뒷골목 들어가는 좁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S는 청년회관 옆 골목으로 해서 사동 뒷골로 방향을 정하였다. 운동과 시간이 합력한 결과 S는 승동예배당 뒷문 옆에 있는 H의 집에서 대여섯 걸음밖에 더 아니 되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저편 호해여관에서 나오는 고부린 골목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쑥 나왔다. 틀림없는 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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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기생집 문 앞에서 맴돌이하던 이야기>-
한국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채만식 선생의 <기생집 문 앞에서 맴돌이하던 이야기>라는 짧은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호해여관’은 현재 인사동 135번지에 있었다.
당시 호해여관은 경성의 대표적인 대형 여관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토론하는 등 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자주 찾는 모임 장소였다고 한다.
이 소설 속 공간에 현재 인사동 ‘코트(KOTE)’가 자리하고 있다. 호해여관은 지금은 없지만 현재 코트 내 오동나무 정원 남측 일대에 큼직하게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본 칼럼에서 처음 소개했었던 인사동 코트는 1930년대 고지도에서도 보이는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중정(Court)을 이루며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코트엔 오동나무 말고도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건물이 있는데 바로 조선극장 터인 해봉빌딩이다.
한때 ‘조선극장 터’ 표석이 놓여 있었던 인사동 문화마당은 사실 옛 종로구청 자리였다. 조선극장은 그곳이 아닌 좀 더 위에 있는 인사동 130번지로, 몇 해 전까지 야구연습장으로 쓰여졌던 공간과 현재 해봉빌딩이 위치한 곳이다.
조선극장은 본래 연흥사라는 극장으로 쓰이던 터에 1922년 당시 14만 원에 달하는 공사비용을 들여 연극이나 영화 상연을 위한 최신식 공연장으로 꾸며졌다.
민족극단인 토월회 창립공연도 이곳에서 열렸으며, 서양영화부터 판소리, 기생 가무공연까지 다채로운 예술공연이 펼쳐졌다고 한다. 이후 영화상설극장으로 운영되다 1936년 방화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고 폐관되었다.
조선극장 터 일부(130-2번지)에 1967년 들어선 해봉빌딩은 지하1층, 지상 5층짜리 작은 오피스 건물이다. 인사1길이 지금처럼 끊기지 않고 피맛골까지 길게 연장되어 있을 때, 그 상권이 여기까지 이어지며 해봉빌딩 1층도 음식점, 주점촌으로 채워져 있었다.
조선극장 터의 기운이 이어졌던 것일까. 채만식 선생의 <기생집 문 앞에서 맴돌이하던 이야기>를 연상케 하듯 여러 영화·예술인들이 찾던 주점이 이곳에 많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1층에 몇 차례 가게가 오픈하고 망하기를 반복하다, 코로나 이후에는 아주 공실이 되기도 했다가 최근 인사동 코트에서 ‘조선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낮에는 카페, 저녁엔 와인바 및 레스토랑으로 재단장해 오픈했다.
일요일마다 재즈공연이 있고, 영화제도 열린다. 가끔 와인학교, 도시건축세미나 등 이 장소와 의미가 통하는 프로그램으로 이 공간이 풍부해지고 있다.
연흥사에서 조선극장으로, 화재로 소실된 빈 터에서 주차장, 야구연습장을 거쳐 지금은 조선살롱으로 이어진 이 땅의 지문엔 비단 물리적 공간이 주는 의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술혼이 있다는 점도 주시해야 한다.
근대건축의 풍미를 내뿜는 해봉빌딩 1층에 자리한 조선살롱은, 단순한 카페가 아닌 인사동 코트와도 공간적으로 겹쳐지고 프로그램적으로도 중첩되는 예술앵커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영화, 그리고 창조예술을 위한 발산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살롱과 인사동 코트를 운영하고 있는 안주영 대표는 과거 독립운동과 예술극장의 힘을 이어받아 이곳에 복합적인 독립 문화공간 설립을 지향하고 있다.
도시가 역사를 품고 풍부한 의식의 켜가 더해질 때 품격이 세워지고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새로움과 역사가 층위를 가지고 혼합되면 아주 흥미로운 도시가 된다.
이곳은 조선극장 터로서, 예술의 혼이, 자유로운 영혼들이 창의적으로 충돌하고 발산하는 곳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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